[방민준의 골프세상]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PGA투어와 LIV골프의 통합 합의를 보며

제이 모나한 미국프로골프(PGA) 투어 커미셔너. 사진제공=ⓒAFPBBNews = News1

PGA투어와 사우디아라비아 국부펀드를 등에 업은 LIV골프가 전격적으로 통합에 합의했다. PGA투어는 7일 발표한 성명서를 통해 PGA투어, DP월드투어(옛 유러피언투어), 사우디아라비아 국부펀드인 PIF(Public Investment Fund)가 골프 통합을 위한 획기적인 합의를 했다고 발표했다. 이 합의에 따라 관련 당사자의 골프 관련 사업 및 권리를 결합해 공동 소유의 영리법인으로 통합하고 그 동안의 모든 법적 소송도 종료하기로 했다.

제이 모나한 PGA투어 커미셔너는 인터뷰에서 “그들은 그들의 길을 갔고 우리는 우리만의 길을 갔다. 그리고 많은 성찰 끝에 이 모든 긴장과 대립이 좋은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고 통합 배경을 설명했다.

이번 통합으로 사우디아라비아 국부펀드 의장인 야서르 알-루마얀이 PGA투어 이사진에 합류해 새로운 독립체의 회장을 맡고 모나한 PGA투어 커미셔너는 CEO를 맡게 되며 PGA투어가 지분 대부분을 소유할 예정인 것으로 알려졌다.

발표만으로 보면 1년여 지속된 PGA투어와 LIV골프간의 갈등과 대립이 해소될 것 같지만 그렇지는 않다. 선수들 사이에도 통합을 보는 시각차가 심하고 9.11 테러 희생자 가족들의 비판 목소리가 높다.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한 중동지역에서의 중국 영향력 확대를 방지하려는 미국 정부의 개입설도 나오고 있다.

합의 자체가 PGA투어 제이 모나한 커미셔너의 말대로 “기본 합의일 뿐 확정 합의는 아니다”라는 점도 미래를 불투명하게 한다. 통합되더라도 선수들이 포함된 PGA투어의 정책 이사회의 승인을 받아야 하는데 통합 발표 후 선수들 대다수가 사우디아라비아 자본을 받는 것에 반대하고 있는 상황이다. 일부 선수는 모나한 커미셔너의 사임을 요구하기도 한다. LIV로 이적한 선수들의 2023시즌 PGA투어 참가 여부, 그리고 2024년 LIV골프 리그의 운영 방식 등도 풀어야 할 과제들이다.

사우디아라비아 국부펀드 의장인 야서르 알-루마얀. 사진제공=ⓒAFPBBNews = News1

통합 합의에 LIV골프 소속 선수들과 PGA투어 소속 선수들의 반응도 대조적이다. LIV골프 소속 선수들은 환영 일색이다. PGA투어 선수들로부터 ‘배신자’라는 비난을 들으면서도 천문학적 이적료를 받고 LIV골프로 이적한 필 미켈슨은 “멋진 오늘(Awesome day today)”이라고 압축적으로 표현했다.

LIV 골프와 적대적이었던 PGA투어 선수들은 합병 소식에 놀라움과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PGA챔피언십 우승자 콜린 모리카와는 “내 골프 인생에서 가장 긴 하루였다”고 당혹감을 털어놨다. 7500만 달러(약 975억원)라는 천문학적 이적료를 거부하고 잔류를 선언한 리키 파울러 같은 선수들도 황당함을 숨기지 못했다. “이제는 아무도 못 믿겠다. 배신당했다”는 글을 개인 SNS에 올린 선수도 있다. 이번 통합 설명을 위해 PGA투어 RBC 캐나다 오픈 대회장을 찾은 모나한 커미셔너는 선수 일부로부터 ‘위선자’라는 비난을 듣기도 했다.

LIV골프로부터 8억달러(약 1조404억원)의 제안을 뿌리치고 PGA투어를 고수한 로리 매킬로이는 “희생양이 된 기분이다. 나는 여전히 LIV가 싫다”고 불쾌함을 드러냈다. 그러면서도 매킬로이는 통합에는 찬성한다는 입장이다. 그는 “돈 많은 사람들을 따라잡기가 어렵고 그들이 골프에 돈을 투자하고 싶다면 그들과 파트너가 되어 제대로 되는지 확인해 보는 것도 괜찮다”고 말했다.

골프 시장이 커진다는 긍정적 신호도 있지만 인권 사각지대인 사우디아라비아의 자본이 세계 골프를 지배하게 됐다는 점에서 파장도 만만치 않을 전망이다. PIF는 사우디의 실권자인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가 이사회 의장이다. 2018년 사우디 출신의 워싱턴포스트 소속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가 피살된 사건의 배후로 미국 정보 당국이 빈 살만 왕세자를 지목했었다.

그동안 LIV 골프의 미국 내 개최를 반대해온 9·11 테러 희생자들 가족들은 PGA투어를 강하게 비판했다. 9·11 테러를 사우디아라비아가 주도했다고 주장하는 이 단체의 회장 테리 스트라다는 “제이 모너한 등 PGA투어 리더들은 자신들의 위선과 탐욕을 부끄러워해야 한다”며 “테러를 주도한 사우디가 모든 프로골프의 자금을 조달하게 됐다”고 비판했다.

통합 합의는 정치적 격랑을 맞을 전망이다. 중국이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한 중동에서의 힘의 우위를 점하고 있는 상황에 위기감을 느낀 미국 정부가 움직였다는 설이 나도는 가운데 공교롭게도 토니 블링컨 미국 국무장관의 사우디아라비아 공식 일정 중 첫날에 통합 합의 발표가 있었다. 골프광인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도 “LIV골프로부터 온 위대한 뉴스다. 골프의 멋진 세계를 위한 크고 아름답고 멋진 계약이다. 모두에게 축하를 보낸다”고 했다.

표면적으로는 LIV골프가 PGA투어와 DP월드투어에 흡수 통합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PGA투어가 사우디의 오일머니에 백기를 든 형국이다. LIV골프의 ‘돈 자랑’을 따를 수 없는 PGA투어의 고민, 메이저대회의 위상 하락에 따른 불가피한 선택의 성격이 강하다는 시각이다.

마치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에 나오는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 그림을 보는 듯하다. 겉으로는 근사한 신사 모자 같지만 실은 코끼리가 보아뱀 뱃속에 있는 그림이다. PGA투어가 코끼리고 보아뱀이 LIV골프 또는 사우디의 PIF가 아닐까.